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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퍼스) 정착기

호주에도 학군이? 헬조선의 교육 문제는 세계 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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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주택 가격에 대해 수다 떨다 알게 된 다소 충격적인 사실.

호주, 아니 호주의 작은 도시인 이곳 퍼스에서 조차 학군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고 심지어 부모를 넘어 조부모까지 관여하는 문제라고 한다.

 

퍼스에서 17년간 거주하고 있다는 중국인 친구한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대번에 '아시아인들이 호주로 이주하면서 분위기 다 망쳐놓고 있는 거 아닌가'부터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명문학교, 엘리트, 학군의 개념은 사실 서양에서 더뿌리 깊게 내려오는 것이란다. 내가 아는 게 한국 사회이고 한국 교육제도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대뜸 편견부터 작동시킨 게 민망한 순간이다. 잠깐만 다시 생각해 봐도 어라 그렇네 싶다. 미국 유명한 사학재단도 떠오르고, 영국의 엘리트 문화도, 일본 사립학교 세일러복도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심지어 현대사회의 학교란 것 자체도 한국의 전통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국공립 초등학교에 진학할 때 아동의 주소지를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처럼 호주에서도 학교마다 거주지에 따른 캐치먼트 지역(catchment area, 학군)이 있다. 한국과 같이 국공립학교 교육비는 무료에 가깝지만 좋은 평가를 받는 높은 순위의 공립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거주해야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의 주택 가격은 타 지역에 비해 두 배 이상 높게 형성되어 있다. 자녀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하고 싶은 학부모의 선택지는 두 개로 좁혀진다. 높은 주거비를 감당하고라도 공립학교 학군으로 이사를 하거나, 감당 가능한(또는 선호하는 명문) 사립학교에 보내는 것. 사립학교는 연간 최소 300만 원이상의 학비를 각오해야 하는데, 비싼 데는 우리나라 비싼 대학 등록금을 능가하는 곳도 많다. 그래서 명문가는 조부모가 학비를 지원하기도 한다고.

 

1. 호주에서 매년 공립/사립학교의 순위를 공개함

2. 상위 국/공립학교 근처 주택 비용이 타 지역과 비교해 유의미하게 높게 거래되고 있음 

3. 과외(튜터)를 비롯한 사교육 시장의 존재 

4. 이미 꽤 오랜 기간 '전통적으로' 여겨져 왔으며, 큰 변화가 없이 유지되고 있음

 

마주한 사실에 뭔가 실망감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호주가 좀 더 나은 교육제도에 성숙한 시민의식이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기회의 평등은 무슨.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부의 대물림, 빈익빈 부익부, 각종 수저로 대변되는 사회 계급론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는 건가.’ 하는 생각. 그리고 동시에 내가 약 4년 이상을 호주/뉴질랜드에 거주하며 경험한 것과 상충되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물론 자녀가 없으니 딱히 교육제도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호주/뉴질랜드는 Second chance가 존재하는 나라로 알고 있었고, 그 혜택을 조금이나마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편하고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야했다. 문명의 발생, 아니 그 이전부터 인간 사회는 온전히 평등한 적이 없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고 동물의 세계처럼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옳은 거 아니냐고 주장하는 이야기가 맞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몇천 년이라는 긴 시간 인간다움을 발전시키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만들어 온 것은 사실 길고 긴 투쟁의 결과이다. 신분, 계급사회에서는 멀어졌는지 모르지만 너무나 명백하게도 자본 계급은 더욱 공고해져가고 있다. 이상적인 나라도 유토피아도 없다. 호주도 마찬가지다. 절대/상대 평가를 통해 좀 더 나은 사회구조, 교육제도를 가진 나라라고 볼 수 있는 지점이 있는 것뿐. 그렇다면 어딜 들여다봐야 하는 걸까. 학군이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그렇다면 이 사회에도 당연히 있을 ‘문제’로 가정해 버린 것, 그래서 불편하게 느끼는 지점 말이다. 

 

나는 공부를 잘하거나 좋아하는 훌륭한 학생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지나면서 수학과 영어는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졌고, 마지못해 동네 학원을 가기 시작했다. 없는 형편에 과외도 했던 기억이 나는데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학원이 더 재밌었던 것 같다. 딱히 미래에 갖고 싶은 직업 같은 건 없었다. 친구가 좋았지만 외로웠고, 성적 호기심과 연애 감정에 눈을 뜨던 시기.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생각한다. 공부보다는 예체능이 재밌었고 그나마 잘하는 것이었지만 아주 뛰어나지 않다면 보통의 과정을 밟는 게 안전하다는 이유로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 대학 진학 외의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부모님의 논리를 반박할 만큼 뛰어나지도, 가슴에 못 박을 만큼 대단히 굳세지도 못했기에 나는 타협했다. 아니, 이제 와서 진실을 고백하자면 나 역시 ‘대학은 나와야지’란 인식에 깊이 동요했던 것 같다. 남들보다 명백하게 뒤처지는 느낌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부모님의 반대를 핑계 삼아 꿈을 접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것보다 더 열정이 생기는 분야를 찾지 못했다.

 

고교평준화 더하기 약간의 운으로 나름 역사와 전통이 깊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학교 생활은 그저 간신히 해내는 수준이었다. 아침 7시 40분에 시작되는 0교시, 밤 10시에 끝나는 야간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의 닭장에 갇혔다. 나는 그저 틈만 나면 졸아대는 닭에 가까웠다. 인문계 고등학생에게 중요한 과목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었다. 다섯 개 중 몇 개 과목은 할만했고 몇 개 과목은 수업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잠드는 날이 늘어갔다. 간혹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과목이 생겨도 잘해봐야 큰 영광은 없었다. 내 안에 뜨거운 질문들은 물을 곳도, 물을 자격도 주어지지 않은 채 뾰족하게 모난 구석 없이 평범한 어른이 되는 과정 방법을 익혀갔다. 점심, 저녁시간에 친구들과 깔깔대기,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로 수업시간 줄이기, 야자 땡땡이치기 같은 소소한 일탈이 숨구멍이었다. 다른 애들은 어찌나 잘 견디던지 나만 산소 부족한 어항 속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는 것 같아 참 못났다 싶었다.

 

견디고 견뎌 졸업장을 따고, 턱걸이로 인서울 했다. 4년간의 학비는 십수 년 전 돈으로도 2천5백만 원을 웃돌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울 유학을 위한 집세, 생활비는 더했다. 부모님이 은퇴 후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작전을 짜야할 시기는 두 자녀의 학비를 감당하기에도 버거웠을 것이다. 그때도 죄송함과 부담감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게 부모님에게 어떤 현실을 의미하는지는 지금만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남들이 다 가는 길을 앞만 보고 쫓아가는 것도 벅찼다. 

 

나의 십대, 중요한 선택들을 복기해 볼 때 ’학군’은 그저 물리적 공간과 제공되는 서비스, 노출되는 환경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딱히 억울하지는 않다. 누구나 몸은 하나, 이 넓은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장소도 매우 제한적이니까. 언제까지 만수르가 아닌 걸 탓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 어쩌면 팔레스타인, 아프리카, 인도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에 감사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여하튼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자신이 만든 룰로만 하는 게임은 없다는 걸 알고도 남는 나이가 되었다. 그때 그 시절 어떤 조건이 바뀐다고 해도 내가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서 SKY에 갔을 거라거나, 굉장한 목표를 세울 수 있었을 거라거나, 의미 있게 훌륭한 선택을 했을 거라거나, 지금 더 성공해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이 나의 삶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과 가장 공정한 기준으로 경쟁을 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때 인문계 고등학교를, 대학교를 진학하지 않았을 거 같긴 하지만 좀 관대하게 보면 ‘학군’ 개념 자체는 자녀교육에 있어 부모가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이자 거의 유일한 리스크 컨트롤 방법에 불과하다는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누군가는 성을 내며 이야기할지 모른다. 부모의 재력에 따라 자녀가 받는 지원, 환경이 달라지고-성적이 달라지고-진학할 수 있는 학교가 달라지고-직업이 달라지고-사회 계층이 달라지고-그 힘이 다시 자녀에게 대물림되는 구조가 보이지 않느냐고. 혹시라도 정말 그렇게 화난 이가 있다면 진정하시길. 나도 그게 문제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니까. 호주에 학군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느낀 실망감, 불편함의 이유는 ‘학군’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표상되는 불평등, 갈수록 더 가파르게 기울어져가기만 하는 운동장 그 자체인 것 같아서 말이다.

 

호주에도 평평한 운동장이 없지만 아직은 끝을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해볼 만한 경기가 펼쳐지고 있다면, 단단해 보이는 ‘-‘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하거나 끊어낼 수 있는 방법에 힌트가 숨어있지 않을까. 은퇴 나이는 65세가 넘어가는데 십 대가 지나면 절대적으로 줄어드는 교육의 기회, 생계를 하면서는 지속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학업, 잊혀가는 인간다움의 의미와 가치, 자연스러운 생의 주기, 그에 맞게 제공되는 사회서비스. 이게 우리가 조금이라도 빠르게, 그리고 깊이 들여다보고 손을 써야 할 부분이 아닌가. 

 

, 고등학교 사교육 문제로 뉴스를 도배하던 강남 8학군도 옛말. 영어는 일찍시작해야 한다며 인기를끄는 영어유치원, 조기유학. 외모도 재물도 남보다 낫고 갖기 위한 무분별한 소비와 경쟁. 대한민국 출생을 특권으로 만들어준 세대의 빈곤 같은 가슴이 답답해지고 무거운문제들만 보이는 시대, 내가 그리고 우리가 비교, 원망, 분노, 포기, 소비 대신 미래, 희망, ,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경험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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