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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journal

은행으로 뛰어가 돈을 보내게 만들다니, 보이스 피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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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머니에 돈 들어오기 전에 받을 게 있다고 하면 다 사기예요!"

 

어쩌면 순진해져 버린 걸지도

핑계부터 대야겠다. 정신 멀쩡하던 날 눈 뜨고도 코 베이듯 당했던 건 아니라고.

 

스물아홉이었다. 친척들이 언제 결혼할 거냐는 질문도 하지 않던 즈음. 나는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피해자인 척하고 싶진 않지만 당시 나에게는 도피만이 살 길이었다.

한국에서 견뎠다면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모습일 수 있었을까.

어쨌든, 얼마 전까지 호주에 살았단 게 거짓말인 것처럼 벌써 아득해져 버린 시간.

돌아온 나는 서른넷이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아 이 시간이 현실인지, 꿈인지, 취한 건지.

카레이싱을 마치고 갓 내린 것 같은, 

방방을 십분 이상 타고 마른땅을 밟은 것 같은,

울렁이는 어지러움이 아직 가시지 않은,

귀국한 지 한 달이 갓 넘어가던 날.

그런 날이었다. 보이스피싱이란 걸 당한 그날은.

 

딸, 가게를 내놨는데 ~

내가 한국을 떠나 있는 사이 부모님은 작은 가게를 냈다.

아직 은퇴할 나이도 아니고 은퇴해도 될 재정상태는 더욱 아니니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한다고.

깔끔해도 너무 깔끔하고, 집에서 먹는 음식처럼 장사를 하는 부모님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런 정성에 비해 저렴하게 여겨지는 메뉴, 저렴한 음식 가격이 오래가진 못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끝내 가게를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팔 수술을 받아야 했다.

 

엄마가 혼자 하려고 했던 가게였지만, 수술한 지 얼마 안 된 팔로 음식을 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그런 엄마를 도와주던 아빠는 결국 풀타임 정직원이 되어버렸다.

자식 입장에선 서로 돕고 사는 부모님이 감사하고 달달해 보이기도 했지만(일하는 내내 투닥거리는 부모님이...)

 

여하튼, 내가 돌아오자마자 가게에 대해 들은 이야기는

'힘들어 죽겠다', '두 사람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든 빨리 팔아치워버리고 싶다'였다.

동네 부동산에도 내놨지만 경기가 영 안 좋아서인지 문의가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며칠 전 엄마가 말씀하셨다, "영 안 되겠어서 교차로에도 내놨어"

이주에 한 번, 가게를 닫고 쉬는 날이었다.

엄마가 한번 먹어봤는데 힘이 나는 거  같더라고 우신탕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심을 먹고 돌아오던 차 안. 엄마의 신나는 목소리가 고요를 깼다.

"문자가 왔네~ 가게에 관심 있다고~ 위치랑 평수가 딱 마음에 든다는데? 근데 우리가 몇 평인지 올려놨던가~?"

 

불행의 서막, 전화를 걸다 

나름 긴 통화였다. 엄마는 성의껏 가게에 대한 설명을 했다. 업종은 뭐고, 가게 문 연지는 얼마나 됐고, 왜 가게를 내놨는지.

그쪽에서도 이것저것 자세히 물어보는 것 같았다. 권리금이 너무 낮은 것 같은데 왜인지, 언제 가게를 비워줄 수 있는지, 집기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오늘 가게를 보러 오고 싶어 했다.

서울에서 간 손님들인데 그 지역으로 이사 가려고 한다고 오늘 그쪽에서 아파트를 계약했고, 앞으로 장사할 곳을 탐색하고 있다고.

하지만 오늘은 이주에 한 번 우리 가게를 닫는 날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말했고,

상대방은 그럼 밖에서라도 가게를 보고 갈 테니 상세 주소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날 다시 연락이 왔다. 밖에다 들여다보니 가게도 깔끔하고, 몇 군데 돌아다녀 봤는데 우리 고객이 딱 마음에 들어 한다고.

가게를 열흘 내로 비워줄 수 있겠냐고 재차 물었다.

업종도 그대로 몸만 들어가 장사를 이어서 하기에 딱 좋은 곳이라며, 권리금이 너무 낮으니 더 받아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권리금을 후하게 받아주면 부동산 수수료나 두둑이 챙겨달라는 당부를 하며, 내일 찾아뵙겠다 했다.

 

엄마는 언제나 임자는 있다. 기다리고 인내하는 자에게 기회가 오는 법이라고 들떠 말씀하셨다.

나는 "그래도 계약을 해야 하는 거지"라고 말했지만 마음속은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오늘 바로 계약을 하러 서울에서 온대!

아침에 가게에 나가시며 엄마가 말씀하셨다 "오늘만 가게 나와서 좀 도와줘, 계약하러 언제 올지 모르는데 바쁠 거 같아"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엄마가 얼마나 기대하던 일인지 알고 있었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겠어, 이따가 늦지 않게 갈게요"

점심 먹고 오후에 서울에서 출발할 거라고 하니 오후에 천천히 나오면 된다고...

오전 내내 뒹굴거리다 점심도 얻어먹을 겸 늦지 않게 가게에 갔다.

 

엄마는 온갖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건물주인한테 월세도 확인해야 하고, 정수기는 그대로 쓴다고 하겠지? 전화번호가 이전이 되는지 물어봐야겠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하면서도 이것저것 챙길 걸 빠지지 않고 챙기느라 손으로는 메모를 해가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 수가 없는 아빠도 "우리가 주지 않을 집기는 미리미리 빼두게, 계약하기 전에 있는 거 다 봤는데 안 주면 그런 작은 게 은근 빈정 상해"라며

짧은 시간 정든 가게를 잘 넘기려 하고 계신 듯했다.

 

엄마 전화가 울렸다. 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아 감정평가요? 그런 것도 있어요?" 엄마는 온 신경을 집중해 저쪽에서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려 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는 말했다. "곧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서 출발한데, 권리금 다 받기로 했다면서, 자기 일 잘하지 않느냐고 묻는데? 하하하"

행복한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이 됐다. 이제 가게 할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오늘이라도 잘 도와드려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들뜬 마음에는 모든 말이 옳게 들린다

나부터도 일하는 게 신났는데 엄마, 아빠는 오죽했을까.

이제 가게 할 날 얼마 안 남았으니 가게 메뉴 먹어야겠다고 능청을 떨며 점심도 맛있게 먹었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부동산에 무슨 사고가 생겨서 같이 오려던 직원이 못 온다고, 아까 이야기한 감정평가 비용을 입금해 주면 된다고, 그리고 권리금을 더 높게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화를 끊은 엄마가 더욱 들뜬 목소리로 해준 이야기는 좀 우습긴 하지만 오랜만에 들어도 정말 있을 법한 막장드라마 스토리였다.

이 가게를 사려는 남자가 어디 건설 현장사무소에서 일하는데, 자기 세컨드인 여자를 위해서 가게를 차려주는 것 같다고.

그런데 가게를 해주면서도 못내 이 여자를 다 믿지 못해 좀 불안해한다고. 혹시라도 가게를 오래 안 하고 뭐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런가?

엄마는 부동산이 언질 하듯 전해준 이야기에 앞뒤로 살을 붙여 이해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는 사적인 거니까 그 사람들 앞에서 티 나지 않게 해달라고 부동산에서 부탁하네"라는 말씀도 잊지 않았다.

점심시간, 몇 개 들어온 주문을 아빠와 함께 쳐내다 고개를 들어 살짝 본 엄마는 잘 안 보이는 눈을 잔뜩 찡그려가며

핸드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처리하기에 바빴다.

 

권리금을 더 주겠다고?

또 전화가 왔다. 이제 자료가 다 준비돼서 서울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가게를 사려는 남자가 아무래도 불안해 안전장치로 부동산 관리 종속계약을 맺기로 했다고 했다.

엄마는 그게 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스피커폰을 킨 채 일하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잘 들어보라는 손짓을 하셨다.

많지도 않던 주문에 바빴던 나는 순간 올라오는 짜증을 꾹 누르고 바쁘다는 입모양을 해 보였다.

 

대충 마무리를 해놓고 엄마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엄마가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바꿨다.  조용히 뭐라고 하는지 설명을 들었다. 전화기에서 나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부동산 관리 종속계약이라고 불리는 제도가 있다고 했다. 근래에 많은 사람들이 명예퇴직이나 조기 퇴직 이후에 큰돈을 투자해 자영업에 뛰어들었는데, 사업이 잘 되지 않아 망한 경우가 많아서 자영업자를 보호하기 위해 생긴 거라고.

일종의 보험 같은 건데, 창업 일 년 내에 폐업할 경우 감정 평가된 금액의 90%를 보장한다고.

고등학교 재학 시절 법과 사회는 늘 1등급을 받던 나였지만, 한국에서 지내지 않은 4년 가까운 공백은 나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런 제도가 생겼나? 내가 몰랐던 건가?

네이버에 검색해 봤다. 부동산 관리 종속계약. 딱 떨어지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지만,

한 부동산이 전담해 매물을 관리하는 사례는 찾을 수 있었다.

'이 주변에 부동산 없나, 가서 한번 물어볼까? 아니, 네이버에 나오는 이런 거랑 비슷한 건가?'

남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하려는 뼈에 새겨진 습관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제도를 의심하기보단 이해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뭔가 미심쩍은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우리는 더 높은 권리금을 받을 수 있는 거니 손해 볼 건 없다 싶었다.

 

이 보험에는 현재 가게 주인이 가입을 해야 하고 다음 사람에게 명의이전이 되는 순간부터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두 사람이 돈거래한 내역이 없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보험사기가 되는 거라고 했다.

 

엄마는 어느새 감정평가사라는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고, 바통을 이어받은 나도 이게 대체 무슨 제도인지 우리가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그가 설명하는 이야기를 내 모든 상식을 동원해 그저 이해하려 애썼다. 내가 그때 중얼거리듯 한마디 하긴 했다.

"근데 우리가 계약도 하기 전에 보내야 하는 돈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이게 300만 원이 넘는데" 

감정평가사는 뭐 반드시 들어야 하는 보험은 아니라며, 그런 건 부동산이랑 이야기하셔야 한다고, 다만 보험이 문제없이 체결되려면 이 가게를 넘기는 계약이 성사되기 전이어야 하고, 상대방이 우리에게 돈을 보낸 내역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그 사람과 금전거래 이력이 없어야 한다면 내 통장이나 아빠 통장으로 보내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는 부동산에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자세히 따져보진 않았다.

시간상 운전 중이어야 하는 부동산 담당자는 가게를 내주기로 한 상간남이 어떤 조치를 취하려고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가게를 계약하러 오는 어떤 여자와 한 차를 타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는 길일테니까 말이다. 대놓고 궁금한 것을 묻기에는 적절한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다.

 

보험료는 352만 원, 88만 원씩 4개 계좌에 입금해 주세요

총 352만 원인 보험료는 감정평가사에게 보내주면 된다고 했다.

88만 원씩 4개 계좌로 나눠서 보내줘야 한다고, 

엄마는  숫자 하나라도 틀리면 안 된다고 불러주는 K뱅크 4개 계좌를 몇 번이나 불러 확인해 가며 손으로 꾹꾹 눌러 적었다.

나는 그 진지한 상황을 지켜보며 부동산 업자의 인내심, 엄마 인내심에 감탄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가 요구한 돈을 입금하다 보니 통장 잔고가 부족하다고 했다.

워킹홀리데이 다녀와 가지고 있던 목돈이 있던 나는 흔쾌히 내가 보내주마 하고 순식간에 인터넷 뱅킹으로 쏴드렸다.

부동산이 우리 지역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두어 시간.

보험사가 닫는다는 오후 4시까지 빨리 입금을 해야 오늘 안에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다고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핸드폰 어플로 계좌이체를 할 줄 모르는 엄마는 잘 안 보이는 눈으로 텔레뱅킹을 몇 번이나 시도하며 짜증 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몇 개 들어온 주문을 처리하고 있었고 어차피 꼭 엄마 명의로 보내야 한다고 했으니 그러려니 했다.

다만 깊어진 주름에 잔뜩 찡그리고 있는 엄마 얼굴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급한 대로 치워놓고 엄마한테 다가가 어떻게 도와드릴까 요하고 물었다.

엄마는 핸드폰을 내줬고, 텔레뱅킹을 해본 적 없는 나는 허둥대다 번호를 잘못 눌러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엄마는 더 짜증을 냈다. 지금 시각은 3시 40분. 4시까지 보내야 하는데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이체 한도에 걸렸다.

 

사기당한 사람들이 은행에 뛰어가 입금한다고 해서 웃었던 기억이

엄마와 나는 서로에게 "핸드폰은 챙겼어?", "혹시 모르니까 통장도 챙겨가요", "지금 몇 시지? 아직 안 닫겠지?" 확인하며

은행으로 냅다 뛰었다. 마지막 한 계좌에 88만 원만 입금하면 오늘의 미션은 성공이다.

근거리에 은행이 있어 시간 안에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뛰자. 나는 번호표라도 미리 뽑아 놓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은행으로 뛰었다. 

우리가 이체를 완료하는 대로 감정평가사 사무실에 불러 놓은 퀵으로 서류를 쏘고,

그 서류로 대출을 받아 잔금을 준다고 했으니 서둘러야 했다.

 

부동산 업자가 분명히 오늘 와서 잔금을 다 치르겠다고 했는데 오늘 언제 대출을 받아 그 돈을 주겠다는 건지 싶었지만

일단 우리가 할 일은 시간 안에 돈을 보내고 이 가게를 좋은 가격에 넘기는 것뿐이었다.

은행에 도착한 우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고,

내 머릿속에선 이체 한도를 조정하는 게 먼저인지 일단 돈을 이체하는 게 먼저인지 계산하고 있었다.

'이체부터 빨리 끝내야 퀵이 출발할 수 있을 테니 일초라도 빨리 이체를 해야 한다.'

순서가 되자마자 일단 입금부터 해달라며 은행원을 재촉했다. 은행원이 주는 서류를 받아 통장계좌, 금액 등을 적었다. 

너무나 급한 나머지 손이 떨리고, 숫자의 자릿수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거 금액 자릿수를 맞춰 적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급한 엄마는 평소에 하지 않을 실수를 연거푸 했다.

"엄마 내가 적을게" 다시 새 종이를 받아 내가 직접 적었다. 습습후후- 마음을 진정시키는 호흡을 하며.

드디어 입금 끝.

감정평가사에게 전화를 해 이를 알렸다. 그는 빨리 처리해 퀵을 출발시키겠다고 했다.

 

엄마와 가게로 걸어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 "부동산 관리 종속계약이라고 했나?"

나, "그런 좋은 제도는 우리 다음에 큰 가게 낼 때 도움이 되겠네요. 뭐 근데 가게비를 비싸게 내야 하니 실용적인지는 그때 따져봐야겠지만"

온갖 똑똑한 척은 다 해가며...

 

그 후로 전화는 없었다, 그리고...

전화도, 사람도 오지 않았다. 부동산 업자는 운전해 오다 휴게소에 들러 전화하겠다고 했었다.

은행에 뛰어갔다 온 지 한 시간.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아 뭐야 계약도 안 했는데 엄청 믿고 보내줬네, 사기 아냐? 빨리 와야 하는데"

내 말을 내가 들었다.

내 말이 내 머리에 울려 퍼졌다.

내 말이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누군가 내 머리를 강타한 것 같았다.

어쩌면 사기를 당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엄마가 공명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아, 사기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이미 보내버린 돈, 그 사람들 아직 올 시간이 안 됐으니 좀 더 기다려보자 했다.

여섯 시가 지나도, 저녁시간이 끝나고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가게에서 나와 전화를 걸었다. 내 뒤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됐어, 전화해 볼 필요도 없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동산, 감정평가사, 가게를 사겠다던 당사자. 아무도.

나는 재빨리 엄마 전화가 아닌 내 전화기를 꺼내 부동산 업자라던 번호로 전화를 걸어봤다.

전화를 받았다.

내가 말했다 "어~ 나야, 어디야?" 

삼초 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경찰에 연락을 했지만 직접 입금한 경우는 일반 보이스피싱과는 또 달라서 지금 조치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했다.

그래도 담당부서를 연결해 줄 테니 물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담당부서라고 연결된 사람은 같은 말을 했다.

그날은 금요일. 경찰서 관련 부서가 다시 일을 시작하는 날은 월요일이었다.

그리고 월요일, 최대한 빨리 찾아간 경찰서에서는 신고 후 정식으로 사건이 배정되어야만

우리 이야기를 꼼꼼히 듣고 사건 접수를 할 수 있어 기다려야 한다고 했지만

2주가 되어가는 지금도 연락이 없다.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이 직접 이체를 해줬기 때문에 보낸 계좌에서 출금하는 것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경찰서에서 공문을 보내야만 한다고 신고 접수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그렇게 워홀 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내가 거의 1년을 일하지 않고 지낼 수 있던 돈은,

다시 해외로 떠나고 싶다면 내 학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 있던 돈은,

귀국 기념으로 몇 달을 신나게 놀고먹었어도 충분했을 돈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어쩌면 너는 가까이 있겠지

어이가 없고 화가 나는 것만큼 두려운 마음도 있다.

그 이유는 그 사기꾼이 우리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고작 2주에 하루, 우리가 문을 닫는 날을 안다는 게,

가게의 크기를 알고 있는 게,

밖에서 안이 잘 들여다 보인다는 말을 한 게,

마치 가게에 와본 것 같아서.

우리가 아는 거라곤 목소리 뿐인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우리를 알 수 있다는 두려움.

오늘도 우리는 손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불안을 느낀다.

 

서른이 넘어 돌아온 나는 순진하고,

이런 사기가 너무나 평범하게 이루어지는 한국은 무섭기만 하고,

2주가 지난 지금도 연락이 없는 경찰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모르겠고,

사기를 당한 피해자로서의 분노보다 나와 가족의 안전을 걱정한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걸리는 점이 많은 허술한 사기.

우리가 말한 적 없는 평수까지 딱 마음에 든다는 말, 먼저 더 주겠다던 권리금, 밤늦게 계약하겠다고 걸려온 전화,

가게 밖에서 보고 가게 인수를 결심했다는 계약 당사자, 여러 계좌로 나눠 보내야 했던 비용,

너무나 익숙하지 않던 은행 이름 K뱅크, 운전 중이라고 했는데 들리지 않던 풍절음.

게다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감정평가나 보험이란 제도.

 

하지만 그땐 다 맞는 말 같았다. 이 허무한 기분을 누가 알까.

가게를 빨리 넘겨버리고 후련해지고 싶었던 부모님을 탓할 수도

안 그래도 한국 물정에 익숙하지 않고 붕 떠있는 매일매일이 힘든 나 자신을 탓할 수도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조금이라도 권리금을 더 받고 싶었던 욕심을 탓할 수도 없는 일.

 

그저, 아무도 이런 사기를 당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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